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1377년 === || [[파일:7EfL1tb.jpg|width=400]][br]'''1377년경 고려 말 왜구의 대규모 침입 피해 상황'''[br] || 바로 전 해에 벌어진 홍산전투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기세는 눈꼽만큼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1377년은 대 왜구 전쟁에서 고려가 이전까지 겪었던 시련들 중에서도 너무나 심대한 시련을 당했던 시기였다. 끝을 모를 정도로 불 붙었던 왜구의 기세는 이제 하늘을 찌를 수준이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지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측의 사진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1377년에는 아예 [[연해주]] 지역과 [[요동반도]]와 [[산둥반도]] 일대를 왜구가 대규모로 공격하여 악탈하고 수탈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여진과 거란지역을 침략하여 악탈하였고 울릉도에서도 왜구의 침략이 이어졌다. 이미 남쪽의 경상도 지역과 전라도 지역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더 이상의 설명조차 필요 없을정도로 심각하였다.]] 탐라와 제주에서 보내던 공물조차 왜구가 악탈하여 개경으로 조운선이 올라가지 못하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 이때 제주도는 스스로 방어하여 제주도 해안가 일대의 환해장성을 다시 쌓는 등의 노력이 이어졌다. 1월, 왜구는 합포의 회원창(會原倉)을 공격하여 '''고려군의 군량까지 약탈했다.''' 당시는 고려군 역시 극도의 군량 부족 사태를 겪고 있었는데, 여러 주군에서 거둔 쌀을 품미(品米)라 하여 보관했는데 이것이 약탈 당한 것이다. 고려군은 왜구에게 군량까지 삥 뜯기는 판이었다. 2월에는 왜구가 신평현(新平縣)[* 충남 홍성군]을 공격했는데, 양광도 도순무사 홍인계(洪仁桂)가 이를 무찔렀다. 그러나 이후 왜구가 현재의 [[천안시]]인 경양(慶陽)을 공격하고 평택현을 공격하자, 양광도 부원수 인해(印海)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3월에는 왜구가 착량(窄梁-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일대로 조선시대에는 손돌목이라 불림)을 공격해서 '''군함 50여척을 모두 불태워''' 고려군의 함선들이 불타는 빛 때문에 밤이 낮 같을 지경이었고, '''죽은 병사만 1,000여명을 넘었다.''' 이때 책임자였던 만호(萬戶) 손광유(孫光裕)는 화살을 맞았으나 간신히 도주에 성공했다. 최영은 일전에 손광유에게 "착량 강어귀에서 군대 위세만 보일 뿐, 절대로 바다로 나가서는 안 된다." 고 주의를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손광유가 잠시 군대를 이끌고 착량을 벗어났는데, 그렇다면 재빨리 복귀해야 함에도 '''술에 잔뜩 취하여 곯아떨어진 사이에 왜구의 기습을 받아''' 군대가 개박살이 나버렸던 것이다. ~~여기도 [[원균]], 저기도 [[원균]]~~ 물론 패전은 손광유의 잘못된 지휘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최영의 당부에서 보이듯이 '''고려 수군은 왜구에게 완전히 제해권을 빼앗겨, 마음대로 바다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이 착량 전투는 고려 입장에서도 아찔한 상황이었는데, 김포시 대곶면은 강화도와 김포 사이인 강화해협의 입구로 조선시대에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온갖 포대로 도배했던 곳이다. 그러한 착량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개경과 남경(지금의 서울)으로 향하는 수로가 그대로 열리는 것을 뜻했다. 아래의 강화도 침공 또한 착량 전투의 여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해주(海州)의 수미사(須彌寺)라는 절이 '''풍수지리상 일본의 맥이 된다'''라는 논리로 문수도량(文殊道場)이라는 행사를 열고 '''수미사에서 액막이를 함으로써 왜구를 막으려고 했다.''' 어찌보면 참 눈물겹기까지 하다. 여하간 왜구는 기세를 이어 강화도를 침공했는데, 만호 김지서(金之瑞), 부사 곽언룡(郭彦龍)은 마리산(摩利山)으로 도망을 갔고 왜구는 김지서의 부인을 납치했고, 왜구에게 [[강간]] 당하지 않으려던 [[처녀]] 세 명이 강에 빠져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고려사 최영전에 따르면 당시 강화도에는 기병 1천여명과 전함 50여척이 있었는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상황이 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나세(조선)|나세]]는 출정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제가 문학으로 나라를 빛낼 수도 없으며, 고관의 후예라서 호의호식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늘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생각해 왔으니 바라옵건대 군사를 지휘해 강화에 들어가서 왜적을 격퇴하게 허락하소서." >---- >'''《고려사》 나세전''' 우왕은 나세의 뜻을 장하게 여기고 대궐에서 기르는 말 두 필을 내려주었으며, 그 휘하 장수들에게 열 필을 나누어 주었다. 나세는 [[조사민]], [[이원계]](李元桂)·[[강영]],·[[박수년]] 등과 함께 왜구를 막기 위해 나섰으며, 최영은 도통사(都統使)로써 승천부에 주둔하여 방비하고 있었다. 또한 [[이인임]], [[경복흥]](慶復興)의 지휘아래 [[이성계]], [[임견미]], [[변안열]], [[양백연]] 등을 두어 적에 대비하게 하는 한편 각 지역에서는 급하게 병사를 징발했다. 그러자 왜구는 강화도에서 물러나더니 수안현(守安縣), 통진현(通津縣), 동성현(童城縣)[* 세 지역 모두 현재의 [[김포시]] 지역이다.] 등을 침략해 '''지나가는 모든 곳을 황폐화시켰다.''' 심지어 왜구들은 이렇게 소리칠 정도였다. >'''"막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으니 이 땅은 참으로 낙토(樂土)구나!"''' 이 당시 최영, 경복흥, 이인임은 모두 현재 충청남도 [[공주시]] 부근에서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최영은 갑자기 '''"왜구가 이토록 마음껏 활개치니 원수된 몸으로써 면목이 없다."'''라고 탄식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런데 다른 원수인 [[석문성]](石文成)은 '''"여기 노래 잘하는 기생이 왔나."'''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등, 여러가지로 개판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강화도에서 수도를 위협하는 적을 막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찰나에, 남부 지방에서 가히 절망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경상도 원수 [[우인열]]이 보고하길, '''"왜적이 대마도로보터 바다를 뒤덮고 와, 돛대와 돛대가 서로 이어질 지경이며, 이미 군사를 나누어 요해처를 지키게 했으나 적의 형세가 너무나 장대하고 방어할 곳이 많아 한 도의 군사로서는 역부족입니다. 조전 원수를 보내주십시오."''' >---- >'''《[[고려사절요]]》 1377년 3월''' 강화도의 적을 막기 위해서만도 여러 재상들이 모두 모일 정도였는데, 저 [[대마도]]에서 동남해의 바다를 뒤덮을 듯한 왜구의 대함대가 구름 같이 몰려와 [[경상도]] 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우인열(禹仁烈)은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당시 고려 수뇌부는 강화도 부근에서 개경을 노리는 왜구만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이런 사태가 발생하자 우왕자왕하며 어찌 할 바를 모르며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병력의 차이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우인열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계속해서 교전을 벌이며 시간을 버는 일밖에 없었다. 4월, 드디어 왜구의 군세는 현재의 [[울산]]인 울주에 도달했다. 우인열은 이곳에서 왜구와 소규모 교전을 벌였고, 이후 밀양까지 밀려나 다시 교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해 전객부령(典客副令) 최방우(崔方雨) 등이 전사했다. 황산강(黃山江)에서는 김해 부사 [[박위]](朴葳)가 적을 쳐 소규모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현재의 [[경상남도]] [[창녕군]] 부근인 영산(靈山)에서는 왜구가 험한 곳에 자리를 잡아 버텨 우인열과 부원수 [[배극렴]](裵克廉)이 적과 싸웠으나 전황이 좋지 못했고, 또한 경상북도 [[경주시]] 쪽에서도 고려군과 왜군이 겨루어 양쪽 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사이 울주, 양주, 밀성 등은 모조리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서 강화도의 전역에서도 왜구의 군세가 움직여 서강 부근으로 이동했기에, 변안열과 최영이 이를 무찔러야 했다. 이 양면 공격 때문에 고려군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우인열은 3월부터 5월이 될때까지 치열하게 왜구와 소규모 교전을 계속해서 벌이며 최대한 버티고 있었다. 이는 우인열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적의 전리품을 노획할 때마다 이를 항상 공평하게 공이 있는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병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열심히 싸운 부분이 컸다. 태산신역(太山新驛)에서는 기병을 이용해 적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적의 병사가 너무 강력하고 숫자가 많아 우인열도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또한 왜구가 밀성 등지에서 [[보리]] 등을 마음껏 빼앗아가고 있어 피해도 커졌는데, 안동조전원수(安東助戰元帥) [[왕빈]](王賓)이 이를 공격해 성과를 올렸으나 피해는 끊임없이 누적되고 있었다. 이 무렵 거의 한달이나 걸려 간신히 사태를 파악하고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고려 조정에서는[* 당시 조정에서는 개경이 너무 왜구에 노출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천도 논의까지 하고 있었다.] 드디어 우인열이 방어하던 경상도 지역에 지원 병력을 파견했다. 그 부대의 사령관은 다름 아닌 '''화령 부윤 [[이성계]].''' 이성계는 삼사우사(三司右使) [[김득제]](金得齊),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림]](李琳), 밀직부사(密直副使) [[유만수]](柳曼殊) 등과 함께 조전 원수가 되어 경상도로 출진했다. 당시 경상도에서는 우인열이 끊임없이 지원 요청을 보내고 있었는데, 정찰병의 보고로는 '''"적의 배가 바닷섬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니 얼마나 많은지를 모르겠다."''' 라는 보고가 올라왔고, 그때까지 이성계가 도착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당시 이성계의 군사는 정예병으로 이름이 높아 각 고을에서는 가움이 비를 기다리듯 이성계의 군사를 기다렸던 것이다. 한편, 우인열의 비보(飛報) 등을 받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이성계는 [[지리산]] 부근에서 왜구가 마주쳤다. 경상도 쪽 바다를 통해 내륙으로 진군한 왜구가 지리산까지 이른 것이다. 양 군대는 불과 2백 보 정도의 거리에서 진을 쳤다. 그때 [[노하라 신노스케|왜구 중 한 명이 엉덩이를 두들기며 도발을 일삼자]] 이성계는 곧 화살을 쏘아 이를 맞추어 버리고는, 경악한 왜구들에게 즉시 공세를 가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왜구는 산으로 도망쳐 깎아지른 듯한 지형을 이용해 칼과 창을 고슴도치 처럼 내밀고 [[우주방어]]를 취했다.[* 이런 전술을 일본에서는 [[센본야리]]([[천본창]]千本槍)라고 부르는데, 보병들이 기마병을 막아내는 전술이었다. 또한 왜구의 침입이 한창 벌어지던 14세기 일본에서는 산위에 목책 같은 방어시설을 갖추고 벌어지는 산악전이 매우 흔했는데, 고려에 침입한 왜구들도 일본 본토에서 하던 대로 [[산악전]]을 이용해 고려군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때 이성계는 정찰 목적으로 비장 한 사람을 보내 상황을 보게 했는데, 이 비장은 돌아와서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는 보고를 했다. 기병대가 많은 이성계의 군대로서는 이런 지형에서 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자 이성계는 훗날의 조선 [[정종(조선)|정종]](定宗)인 [[이방과]](李芳果)를 재차 보내 다시 정찰하게 했다. 그러나 이방과 역시 돌아와서는 비장처럼 "어렵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그럼 내가 직접 가서 보겠다. 너희들은 내가 혹시 적에게 진격하면 곧바로 뒤를 따라라."''' 라고 말하고는, 직접 적의 진영을 살피며 지세를 한번 보고는 무슨 틈을 찾았는지 '''다짜고자 말도 없이 적에게 달려들었고''' 이성계의 군사들 역시 바로 그 뒤를 따라 달려들었다. 그러자 왜구는 [[탱크]]에 치인듯 막대한 타격을 입고 밀려나더니, 결국 산의 낭떠러지에서 밀려 나가떨어진 사람들이 수두룩 했다. 이렇게 지리산까지 몰려온 왜구들을 이성계가 무지막지한 전술로 날려버렸을때, 황산강에서는 김해 부사 박위가 왜구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당시 왜선 50여척이 김해의 남포(南浦) 부근에서 순풍을 타고 낙동강 하구를 30km 거슬러 올라가 밀성을 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정보를 얻었던 박위는 30여척의 함선으로 복병을 놓아 기습함으로써 이 왜구들을 대부분 섬멸했다. 또한 [[배극렴]]은 적의 괴수인 패가대(覇家臺) 만호(萬戶)라는 자와 싸웠는데, 패가대는 큰 쇠투구를 쓰고 손발까지 덮은 갑옷으로 무장하고는 보병을 좌, 우익으로 나눠 달려들었다. 이 왜구들은 기세 좋게 달려들다 진흙탕 때문에 말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는데[* 이 장면이 잘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일본식 갑옷인 [[오오요로이]](大鎧)는 완전히 갖춰 입으면 그 무게가 30kg에 이를 만큼 꽤나 무겁다. 패가대 만호라는 왜구 두목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로 진흙탕에 들어갔다가 그 무게로 인해서 진흙탕에 말의 다리가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고려군이 그 틈을 노려 공격하는 바람에 죽었던 것이다.], 그 틈에 배극렴은 공격을 가하여 패가대를 죽이고 왜구들을 몰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상도에서 간신히 사태가 진정될 무렵, 또다른 전선인 강화도 부근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강화도의 왜구들이 양광도의 고을들을 털어버렸는데 이에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었던 것. 당시 왜구는 22척의 함선이었으나 고려군의 함선을 노획하여 50여척을 넘었는데, 노획한 고려 함선을 앞에 세우고 다니자 '''왜구를 고려군으로 오인한''' 백성들이 피하지 않았다가 학살당하는 위장 전술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왜구들은 [[천안]]과 [[안성]]까지 진격했는데, 양광도 원수였던 [[왕안덕]](王安德)은 적의 기세가 두려워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하다가 부원수 [[인해]], 양천 원수 [[홍인규]](洪仁圭) 등을 불러 적을 요격하려고 했으나 적은 작전을 눈치채고 이동을 했다. 이에 왕안덕은 어쩔 수 없이 적에게 달려들었으나 이기지 못하고 왕안덕 자신도 부상을 입고 몰았다.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수원 부사였던 [[박승직]](朴承直)은 왕안덕, 인해, 홍인규 등 세명의 원수가 온다는 소식에 군대를 이끌고 나가 밭을 매는 자들에게 "원수들이 온다고 하는데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 물었고, 이에 밭 매던 사람들은 "적이 이미 물러나 원수들이 쫓고 있다." 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박승직은 안성의 관사로 들어갔다.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그런데 이것이 속임수였다!]] 사실 밭 매던 사람들은 '''변장한 왜구로''' 이에 속은 박승직이 안성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왜구가 쏟아져 나왔고 박승직은 혼자 간신히 이를 돌파할 수 있었으나 대다수 병졸들은 왜구에게 학살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박승직의 군대는 전멸하고, 왕안덕의 군대도 패전하자 수원, 양성, 안성 부근의 고을들은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는 폐허가 되고 만다.''' 그런데 왕안덕의 패배는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경황 없는 와중에 고려군은 왜구의 포로 한 사람을 잡을 수 있었는데, 왜구에게 실토를 들어보자 무시무시한 음모가 튀어나온것. 강화도의 왜구들이 양광도를 친 이유는 '''"양광도를 쳐서 최영을 양광도로 끌어내고, 그 사이에 비어있는 개경을 급습하려는 것."''' 이라는 경악스러운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음모가 밝혀졌다고 해도, 당장 양광도가 쑥대밭이 되고 있는데 지원군을 안 보낼 수도 없었다. 조정에서는 성사(贊成事) [[양백연]]과 평리(評理) [[변안열]], [[임견미]] 등을 파견하려고 했는데, 그때 [[최인철]]이 개경으로 와 '''"신이 왕안덕 등을 독려해서 왜구를 무찔렀다."''' 는 거짓 보고를 올려 군대의 파병은 취소되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정반대로 최인철이 보고한 이후에 양백연 등이 출전한 것으로 나오나, 고려사 왕안덕전에서는 양백연 등의 파병이 최인철의 거짓 보고 이후에 취소된 것으로 나온다.][* 양백연은 어느 정도 전과를 올린 장수였으나, 워낙 품행이 좋지 않고 여인들과 사통하는 등 행실이 좋지 않았다. 고려 백성들은 '''"양백연보다는 차라리 왜구를 만나는게 낫다."''' 고 했다고 한다.] 이후 6월 달 최인철의 거짓 보고가 밝혀져 최인철은 곤장을 맞고 죽었다. [[파일:sB9aJTY.jpg|width=300&align=right]]이러는 상황에서 백여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왜구 부대가 남양(南陽), 안성, 종덕(宗德) 등을 휩쓸었으며, 이미 왜구 소굴이 되어가고 있었던 강화도에서는 다시 50여척의 왜구 함선이 나타나 부사 김인귀(金仁貴)를 죽이고, '''경계를 서던 고려 병사 천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나세가 양백연과 함께 전함 50여척을 이끌고 나서 싸워 이들을 쫓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승리를 거둔 나세는 강화도 땅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어떤 아낙네가 적의 첩자가 숨은 집을 알려주어 이를 불태워서 왜구를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강화도는 여전한 위협으로 [[봉화]]가 꺼질 줄 을 몰랐으며, 덩달아 개경 역시 계속해서 비상 사태가 되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이후 다시 왜구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살육과 약탈을 했다. 6월, 왜구는 신주(信州), 옹진(甕津), 문화(文化)[* 이 지역 모두 현재의 [[황해남도]] 지역이며, 신천군과 옹진군 등이다.] 등을 공격했는데, 나세와 심덕부(沈德符), 조인벽(趙仁璧) 등은 열심히 싸웠지만 적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 패배하고 말았다. 같은 시기 [[전라남도]] 역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순천에서 정지는 왜구와 교전하여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다. 그 사이에 서해도의 안주가 왜구에게 공격 당했으며, 장택현 역시 공격 당했다. 그 사이에 [[제주도]] 역시 왜구에 공격 당했는데, '''무려 함선 2백여척'''이 나타난 것이다. 또한 영강(永康)ㆍ장연(長淵)ㆍ풍주(豊州)ㆍ안악(安岳)ㆍ함종(咸從)[* [[평안남도]] 지역이다.]ㆍ삼화(三和)ㆍ강서(江西) 역시 공격을 당했다. 7월 무렵이 되자 고려는 [[가뭄]] 때문에 국가 재정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왜구의 침공은 계속 이어져 풍주(豊州) 등이 공격 당했고, 상원수 박보로(朴普老) 등이 나가서 싸웠으나 조천옥(趙天玉) 등이 전사했다. 이때 우왕은 사신을 보내 각 지역의 산성을 수리하게 했다. 8월에는 왜구가 해주(海州) 등 황해남도 지역을 공격했는데, 나세 등이 전황이 불리하여 장수를 파견해 달라고 하자 이성계, 임견미, 유만수, 변안열 등과 함께 급히 파견되었다. 이 싸움에서 임견미와 변안열은 초전에 패배하여 물러났는데, 이성계는 직접 대우전(大羽箭)을 쏘며 싸움을 독려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임견미 등은 자신들이 패배한 사실은 숨기고 이 공적을 가로채려고 했다. 이성계는 그런 문제는 뒤로 하고 남은 적을 소탕하기 위해 나섰는데, 적들이 험한 지역에 몸을 숨기고 섶을 싸아 버티고 있자 이성계는 신조(神照)라는 승려와 함께 '''갑자기 고기를 뜯으며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서 군대를 지휘해서''' 화공으로 적을 공격하게 했다. 섶에 불이 붙어 연기가 오르자 버티지 못한 왜구는 결국 험한 지역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최후의 발악을 했는데, 이성계는 '''이를 안주 삼아 구경하면서 술을 마셨다.''' ~~[[베어그릴스|불타는 왜구는 훌륭한 안주 공급원이죠.]]~~ 급기야 발악으로 날린 왜구의 화살이 '''의자 앞에 놓인 술잔마저 깨부셨는데도''' 이성계는 여전히 앉아서 휘하의 김사훈(金思訓), 노현수(魯玄受), 이만중(李萬中) 등을 시켜 남은 왜구를 깡그리 소탕해 버렸다. 그러지 9월에는 전라남도 영광, 전라북도 고창, 전라남도 [[함평군]] 지역 등이 공격당했고, [[황해북도]] 지역에도 왜구가 다시 돌아왔다. 또 경상남도 하동도 왜구에게 공격을 당했으며, 홍주(洪州)로 온 왜구들이 목사 지득청(池得淸)의 처를 죽였다. 이때 왕안덕은 노현(蘆峴)에서 왜구와 교전했으나 패배했으며, 다음날 적이 온수현(溫水縣)[* 지금의 충남 온양시]에 들어와 군영을 불태우자 밤에 교전이 벌어졌는데 [[모랄빵|사졸들이 놀라서 달아나는 바람에 전사자가 속출했다.]] 10월에는 왜구가 40여척의 함선으로 하동군을 공격했으며, 충청남도 아산 부근이 왜구에게 공격을 당하자 왕안덕은 아주(牙州)에서 이를 격퇴했다. 현 전라북도 [[익산시]]인 함열현(咸悅縣) 역시 왜구에 공격을 당했다. 11월에는 왜구가 부여ㆍ정산(定山)ㆍ홍산 등으로 쳐들어왔고, '''130여척'''의 왜선이 김해 등을 공격하자 배극렴이 나가서 싸웠으나 패전했다. 또한 현 경기도 김포시 부근등도 계속 공격을 당했다. 12월에는 마지막으로 순천에서 병마사 정지가 왜구를 격파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고려는 길고 긴 1377년의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이제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